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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투후원회 재조직 사업

약사    규약

▣ 1993년 전해투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권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턱없이 부족한 임금, 억압적 노무관리와 현장통제 속에서 해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쟁취하는데 앞장섰다는 이유로, 구속의 협박과 폭력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지키고자 했다는 이유로 자본과 정권에 의해 현장에서 밀려났다.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이 처음 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은 91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국 해고노동자 모임' 이란 명의로 유인물을 발행하면서부터이다. 92년 5월 '전국 해고자 수련회'를 매포수양관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 대우정밀, 지하철공사, 태평양화학, 한진중공업, 대우자동차, 인천해고자협의회 등에서 온 동지들이 참석하여 전국 해고자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의하고 조직책에 지하철 한 동지를 선정하였다.

이러한 해고자들의 노력과 전노협의 지원에 힘입어 92년 10월 24일 부산 대문창회관 '대우정밀해고자복직협의회' 사무실에서 대우자동차, 대우조선, 지하철, 태평양화학, 현대자동차, 부산 고무노협, 마창, 광주, 인천, 서울, 풍산, 의보 등의 동지들이 참석하여 전해투 준비모임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실천방침들이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해고 동지들은 1992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를 몇 일 남겨두고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노동악법 개정과 해고자 원상회복'을 위한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철야농성 투쟁을 마치고 전해투는 여의도에서 개최된 92년 노동자대회에 참석하여 당시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의 투쟁을 전국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이후 투쟁의 전초를 마련한다.

그후 전해투는 대표자회의를 통하여 지역별, 전국적 동시 출투와 항의방문 투쟁을 전개하다가 1993년 3월 10일 이인제 노동부장관의 약속으로 단식농성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인제의 발표 후 복직된 노동자들은 당시 해고 노동자 5,200여 명 중 8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80여명조차도 노동부의 지침에 의한 복직한 예가 아니었고, 정부의 그 어떠한 가시적 조치도 없었기에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은 또다시 민주당 마포 중앙당사에서 2차 철야농성을 전개하였다.


▣ 1994년 전해투

   94년 5월 노경총 임금합의가 발표되었다. 전해투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천만 노동자들의 생존을 팔아먹는 어용 한국노총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투쟁이 해고자 복직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5월 14일 한국노총을 점거, '한국노총 해체'를 주장했다.

점거투쟁으로 농성 중이던 66명이 연행되어 5일에서 14일간 구류를 살고 6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그러나 한국노총 점거투쟁은 권력의 시녀인 한국노총의 어용성과 폭력성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였으며 민주노조 진영에서 전개되었던 한국노총 탈퇴 운동을 가속화시키기에 이르렀다.


▣ 1995년 전해투

   4월, 전해투는 노동악법 철폐와 구속, 수배, 해고노동자 원상회복을 위한 해고노동자 대회를 치르고 노동부 장관 면담을 위해 과천 노동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투경찰과 청사경비대는 합동작전으로 전해투 동지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 이날의 투쟁으로 많은 동지들이 실신하고, 다쳤으며 병원으로 후송한 동지들마저 강제 연행, 구속되었다.

5월,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 양봉수 동지가 정문 출입을 가로막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비들에 맞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하였다. 양봉수 열사의 죽음으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다시 투쟁으로 떨쳐 일어났고, 마침내 민주집행부를 탄생시켰다.

12월, 병역특례 해고자들의 투쟁이 타올랐다. 젊은 청춘 내내 병역특례 노동자로 복무하고 특례만료 몇 개월을 남겨놓고 해고당하자 군대징집 영장이 발부되어, 5년간 수배를 받으며 수배해제, 원직복직을 위해 투쟁하던 조수원 동지가 정권의 기만과 외면에 항의하여 그해 12월 15일 여의도 민주당사 계단 난간에 목을 매고 말았다. 조수원 열사의 죽음은 당시 병역특례해고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었고 병역악법을 개정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열사의 죽음과 전해투의 투쟁은 병역특례 해고자들에 대한 수배해제를 이끌어 내어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자들이 복직되는 결과를 낳았다.


▣ 1996년 전해투

   공공부문의 해고자들(한국통신, 지하철, 의보 등)의 '공해투' 결성과 명동성당 투쟁, 한진, 대우, 기아, LG, 의보 등 재벌그룹에 맞선 해고투쟁이 진행되었다. 길거리에서 노숙투쟁,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천막농성 투쟁, 그리고 40여일 간의 단식투쟁 등을 통해 많은 동지들이 원직복직을 쟁취하게 되었다.


▣ 1997년 전해투

   96-97 총파업!

   총파업이 보여준 그 모든 위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단사별로 자행되는 탄압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구속, 수배, 해고의 악순환으로 민주노조진영은 각개격파 당할 것이라는 점을 선전, 선동하면서 총파업 투쟁을 적극적으로 투쟁을 조직하였다.

이후 전해투는 해고자 원직복직 문제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에 긴밀한 관계를 연관시키며 투쟁해왔다. 또한 전해투는 민주노총 사업장 외에 한국노총 사업장, 미조직 사업장, 비정규직의 해고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


▣ 1998년 전해투

▣ 1999년 전해투

▣ 2000년 전해투

▣ 2001년 전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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